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니콜로 마키아벨리 (문단 편집) === 체사레 보르자와의 만남 === 한편, [[프랑스]]의 [[루이 12세]]는 아버지와는 다르게 교황과 편을 먹고, 교황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와 함께 [[피렌체]] 북쪽에 위치한 [[밀라노]]를 점령했다. 피렌체는 친프랑스 정책을 펼치고 있었기에 크게 걱정할 일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체사레 보르자였다. 체사레 보르자는 포를리를 집어삼킨 뒤 아드리아 해안의 페사로와 리미니를 손에 넣으면서, 점차 피렌체의 북부 지역에 그 자신의 영토를 야금야금 확장했고, 이에 피렌체는 위협을 느끼기 시작했다. 1500년, 결국 피렌체는 위기를 타개하고자 프랑스에 마키아벨리를 파견한다. 마키아벨리는 낡은 복장으로 화려한 프랑스 궁전을 돌아다니면서 최선의 결과를 얻으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감정과 논리만으로 호소하기에는 한계가 있었고 [[프랑스인]] 동조자를 [[뇌물]]로 매수하는 것이 최선의 판단이라고 피렌체 정부에 보고했다. 마키아벨리는 한쪽이 다른 쪽의 목을 조르는 상태에선, 양심이나 공정한 태도, 또는 주장의 정당성에 호소한들 소용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의 통찰은 정확했고 결국 피렌체 정부가 돈을 보내오고 나서야 프랑스 국왕은 체사레 보르자에게 해당 지역을 간섭하지 말도록 지시했다. 피렌체의 여러 고위 인사들은 마키아벨리의 외교활동을 성공적으로 평가하고 격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1501년, 32살의 마키아벨리는 8월의 어느 날, 명문가에서 자란 마리에타 코르시니와 결혼했다. 한편 마키아벨리의 성공적인 외교활동으로 체사레 보르자는 이제 프랑스의 왕 루이 12세를 자극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했다. 그러나 그는 1502년 6월, 피렌체 동쪽 산악 요충지인 우르비노 공국을 기습 점령하면서 피렌체에 다시금 긴장을 조성했다. 그는 이 지역에서 자신이 확립한 패권을 인정해 달라는 내용의 협정을 맺기 위해 피렌체 정부에 대표단을 파견해줄 것을 요구했다. 이에 마키아벨리가 사절로 파견되었다. 마키아벨리는 우르비노에 도착한 뒤, 자정이 넘어서야 궁전의 새 주인인 체사레 보르자를 접견할 수 있었다. 횃불이 어른거리는 음산한 분위기에서 마키아벨리는 다른 누구보다도 야릇한 매력을 발산하는 사람, 그리고 훗날 《군주론》에 나오는 무자비한 참주의 본보기가 될 사람을 대면했다. 이 첫번째 만남이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는 마키아벨리의 저작에서 체사레 보르자의 경력에 할애된 분량으로도 판단할 수 있다. 피렌체 정부의 우유부단함과 다르게 체사레 보르자의 단호하고 당당한 모습은 마키아벨리에게 두려움과 존경심을 동시에 불러일으켰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를 경외의 시선으로 바라보면서 속으로 감탄했다. 그러나 자신의 본분은 잊지 않았다. 체사레 보르자가 [[피에로 디 로렌초 데 메디치|피에로 데 메디치]]의 복귀를 거론하면서 너무 멀리나가자[* '피에로 데 메디치'의 복귀란, 피렌체 공화국이 다시 메디치 가(家)가 지배하는 군주국으로 되돌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주제넘은 말에 마키아벨리는 발끈하며 피렌체의 일은 피렌체 사람들이 알아서 한다고 응수하였다. 그의 노골적인 협박에도 불구하고 마키아벨리와 피렌체 정부는, 일단 [[루이 12세]]가 체사레 보르자의 꿍꿍이를 알아차리기만 하면 더는 약자를 괴롭히지 못하도록 막을 것이라고 판단했고 시간을 벌기 위해 꾸물거렸다. 마키아벨리는 그 비굴한 게임을 해야 하는 자신의 처지가 안타까웠지만 달리 다른 방도가 없었다. 그는 모호한 대응으로 일관하면서 시간을 벌었고 다행히 루이 12세가 체사레 보르자의 영토확장에 깜짝 놀라 개입하면서 당장의 위기를 모면하였다. 그러나 이는 단지 시간을 번 것에 불과했고 그 누구도 체사레 보르자의 야심을 막을 수 없을 것 같았다. 하지만 운명의 여신은 이 모든 상황을 한순간에 반전시켰다. 1503년, 교황 [[알렉산데르 6세]]와 그의 아들 체사레 보르자는 연회를 갔다온 후 구토를 동반한 고열에 시달렸고, 교황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났다. 이로서 체사레 보르자의 세력확장에 대한 교황의 비호가 갑작스레 사라질 위기에 처했다. 물론 그는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한 상태였고, 그가 1달 넘도록 병으로 고생하면서 자리를 비우고 있어도 그의 부하들은 감히 반란 일으킬 생각을 하지도 못했을 정도로 그의 입지는 탄탄했다. 그러나 체사레 보르자는 여기서 결정적인 실수를 하고 말았다. 다음 교황이 되려는 [[율리오 2세]]가 계속해서 그를 예전처럼 비호해 주겠다고 한 약속을 순진하게 믿었던 것이었다. 체사레 보르자는 율리오 2세가 교황이 되는 것을 충분히 방해할 수도 있었고 이를 통해 가장 큰 경쟁자이자 장애물이 성장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지만, 그는 순진하게 그 약속을 믿고 율리오 2세를 가만히 내버려 두었고, 결국 다음 교황으로 선출된 율리오 2세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채 적당한 핑계를 대며 체사레 보르자를 체포하곤 감옥에 가둬버렸다. 그리고 체사레 보르자가 이끌던 군대의 잔당들은 자연스레 괴멸당하면서 피렌체는 다시금 안정을 되찾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